임진왜란전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 가 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지니고 있었다는 한중일 삼국지도를 보면서 느낀 점이 있었는데요.
이것은 조선에서 만든 지도가 아니라 도요토미가 가지고 있는 지도입니다.
이 지도에서 조선의 수도 이름은 경(京)입니다. "수도" 라는 뜻의 글자이죠.
하지만 중국(차이나)의 수도들은 북경, 남경입니다. 말 그대로 북쪽 수도, 남쪽 수도라는 말이지요. 표식 또한 조선 수도인 경(京)과는 달리 글자에 흰색 표시가 있습니다.
이 지도만 보자면, 도요토미의 생각에 중국이란 나라는 없으며 조선반도의 수도인 서울이 말 그대로 경(京, 수도)이고, 중국의 북경,남경은 말 그대로 북쪽 요충지, 북경과 남쪽 요충지 남경이죠?
또하나, 눈여겨 볼 것.
어떤 나라 사람이든지, 지도를 만들 때는 자기나라를 가운데에 놓고 만듭니다. 하지만 도요토미가 가지고 있었다는 이 지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치 조선이 중심이고, 일본과 중국(명나라)는 주변국 같게 만들지 않았나요? 일본을 가운데 놓아도 이 지도상에서 별 의미 없는 명나라의 왼쪽만 가릴 뿐인데, 쓸데없이 명나라를 많은 부분 표시해 두고 조선을 가운데 떡 놓았군요
이 지도, 생각해 볼 부분이 많은 자료로군요.
느끼는 점이 있네요....
이 문서가 쓰인 날자는 천정 20년 정월, 1592년 정월 입니다. 도요토미의 지시서한이며 도요토미의 인장이 찍혀 있는 이 문서는 고려(조선)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적어 놓았습니다.
먼저 고니시(小西行長) 휘하의 장수인 오오제키(大關)의 전기인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에는
"5월 3일 술시(오후 8시) 조선의 도읍 동대문 안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옥루금
전(玉樓金展)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보
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고 서술되어있다.
오오제키는 그가 처음 본 경복궁의 모습과 이를 본 왜군 장수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
하였다.
'내리(內裏)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
보니 궁궐은 구름 위에 솟아 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후궁(後宮)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臺上)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 있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
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그지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天子-國王)의 옥좌(玉座)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
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서 눈물을 흘리었다.'
위의 자료는 왜군이 들어 오던 당시 서울의 상황에 관한 조선측 자료보다 신빙성이 크다. 이렇
게 보면 당시 왜군의 선봉대로 고시니 부대가 서울에 처음 들어 온 5월 3일에는 궁궐이 파괴되
지 않은 상태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왜군의 두 번째 부대인 가토오(加騰淸正) 부대가 서울에
들어 온 때는 이튿날 5월 4일 오전이었다. 그때까지도 궁궐은 보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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