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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국내여행

2.6(토) 영주,봉화.

by Anakii 2021. 2. 7.

순흥고분 - 소수서원 - 부석사 - 이몽룡의 모델 성이성 선생 생가 - 닭실마을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풍기에서 진출했다. 잠깐 풍기 하나로마트에 들러 막걸리를 사고 건너편에 있는 황토골인삼불고기 본점에서 함흥냉면과 육개장을 먹었다. 인생 냉면에 인생 육개장.

소수서원 가는 길에 안내판이 보여 갑자기 순흥 읍내 고분에 다녀왔다. 고구려 양식을 따르지만 신라 고분이다. 560 년경 만들어졌다고 하며 세상에나~~ 내부로 들어가서 벽화를 볼 수 있다. 이런 고구려 양식 벽화 고분은 한반도 남부에서 유일핟가고 하는데 이걸 그냥 공개하나? 회벽에 그린 벽화라서 계속 공기와 접축하면 지워질 텐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벽화는 꽤 잘 보존되어 있었고 뱀을 잡고 있는 역사와 선녀 등등의 모습이 분명 고구려 양식이다. 오랜만에 카메라 삼각대를 가져왔는데 어두운 곳에서 아주 잘 써 먹는다. 

소수서원에 도착했다. 원래 주세붕선생이 안향을 기려 백운동서원을 지었는데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오며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명종 임금의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입구의 소나무 숲이 정말 멋지다. 수백년된 소나무가 가득이다. 서원 자체는 크지 않고 소박하다. 간단히 강학당(교실)과 문성공묘(안향의 사당)가 동서로 배열되어 있고 그 뒤엔 3천권의 장서를 보관했던 대학 도서관인 장서각, 집무실 겸 숙소인 직방재, 일신재, 원생들의 기숙사인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는데 기숙사라기엔 매우 작은 건물들이다.

서원 뒤엔 선비촌이라고 한국 문화 체험 테마파크가 있었다 대부분의 체험 시설들은 운영되지 않고 있다. 영주 각시의 고택 뜰을 옮겨와서 마을같이 만들었다 정말 멋진 양반 가옥들이 많다 들어가서 쉬어 가기에도 좋고..

부석사는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이라는 이름으로 여섯군데의 다른 절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

둔대 있을 때 20년 전에 한번 왔었는데 전혀 모르겠다. 일주문에 새로 칠한 단청이 은은하면서도 화려하다. 부석사의 계단은 무척 가파르고 건물의 배치는 불국사를 연상시킨다. 오밀조밀하게 늘어서 있고 방향도 약간씩 틀려 있어서 더욱 편안한 느낌을 준다.

무량수전의 부처님 방향이 산을 등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쪽을 등지고 있다 그래서 무량수전에 들어서면 부처가 왼쪽에 위치에 있게 된다. 무량수전 건물 안 거대한 기둥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은 일본의 동대사에서 보았던 것이다. 단청이 화려한 다른 전각과는 달리 무량수전으로 통하는 범종각, 안양루와 무량수전 이렇게 일직선으로 놓여있는 새 건물이 모두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다. 매우 고즈넉하고 소박하면서 권위있게 보인다.

내려오는 길에 영주 사과 농민에게서 흠결 있는 사과를 만 원 주고 샀다 거의 10kg 정도가 되는 사과다. 아삭하고 향이 좋았다. 주차장에 와 보니 벌써 12000보가 넘었다 오늘 목표 끝. (이날 사과, 샘플 말고 대부분 맛이 너무 없어 놀랐다...)

부석이 저것
무량수전

숙소인 해저리 만회고택으로 가다가 이몽룡생가라는 낯선 간판을 봤다. 이게 뭐야? 이몽룡 생가라고? 직접 가 보니 계서 성이성 선생의 종택인 계서당이다. 이 분이 바로 춘향전의 모델이라는 것. 실제 4차례 암행어사로 활약했고 부패 수령들을 봉고파직 시켰으며 춘향전에 나오는 그 유명한 시는 중국에서 내려오는 시를 살짝 바꿔 실제 이 분이 부패한 수령들 앞에서 호령한 시다.

선생의 자손 께서 그 집을 관리하고 계신데 그 분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고 위키백과에서 검색해 본 결과도 놀랍다. 남원에서 심지어 집을 그대로 떠서 광한루 옆에 놓으라고 했다고 한다. 봉화군은 도대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봉화 군청에 성이성 선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집은 완전 방치 상태로 팻말 하나 덩그러니 있다.

성이성 선생과 이몽룡

문화콘텐츠 닷컴에 따르면 어린 시절 성이성선생과 춘향의 러브스토리는 유추 가능한 사실이다, 암행어사로 돌아와 수령들을 파직시킨 것도 사실, 시를 읊은 것도 사실, 시는 스승에게서 배운 것. 어린 시절 성이성의 스승은 조경남. 그는 남원의 유생. 조경남이 춘향전의 작가. 와우. 이런 놀라운 사실을 이렇게 우연히 알게 되다니.

  • 문화콘텐츠닷컴 청백리가 된 암행어사 성이성 (링크)
  • 호남어사 성이성 암행록 (인조 15년/1637년) (링크)
  • 호남어사 성이성 암행록 (인조 25년/1647년) (링크)

여러 자료에 나타난 팩트는 이렇다.

1) 선조40년 (1607) 남원부사로 발령받은 아버지 성안의를 따라 남원에서 13~17세까지 살았다. 대부분 남원 부사들이 비리를 저질러 몇 개월에서 1년 남짓하게 근무하는데 성안의는 5년이나... (실록)

2) 임진왜란때 남원에서 일어난전 의병장 조경남이 어린시절 스승임. 그에게 의로운 삶에 대해 가르침. 이 때 유명한 금준미주는... 시의 원형을 배움. (문화콘텐츠 닷컴)

3) 광한루에 자주 놀러다니고 이 때 기생 춘향을 만나 사귀었을 것으로 추측. 이때 시중에는 성이성과 춘향을 소재로 한 춘향전이 희극과 인형극, 만담 등으로 확산되었는데, 양반가의 자제의 스캔들이라 하여 조선조정에서 관을 시켜서 금지하게 되자 성몽룡을 이몽룡으로 바꾸고, 성씨(姓氏)가 없던 기생인 춘향에게 성씨 성을 붙여서 시연하게 됨 (위키백과)

5년 후 아버지는 승진 발령되어 남원을 떠남. 이 후 광해군 8년 (1616년) 생원시, 진사시에 합격하지만. 광해군의 난세에는 벼슬하지 않음. (위키백과)

인조 5년 (1627년, 33세) 병과 합격 사간원,홍문관,사헌부 등 감찰기관에서 근무. 인조15년 (1637년) 1차 호서 암행어사로 파견

인조17년~22년 (1639~1644년) 호남 암행어사 파견. 남원에 가서 스승 조경남을 만남 (암행일지)

인조 25 (1647년) 호남으로 2차 파견 1647년 12월 1일 남원 광한루원에서 늙은 기생을 만나 환담하다가 어린시절을 추억하며 잠을 못이룸
'서리와 함께 난간에 앉으니 눈빛이 뜰에 하얗게 깔려있고 대나무숲이 희었다. 나는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하여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암행일기) 

호남 암행어사가 되었을때에 호남 12고을 군수, 현감들이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성이성은 암행어사가 걸인의 행색을 하고서 연회장에 나타났다. 호남의 12고을의 군수, 현감들은 그를 조롱하며 '그대가 시를 지으면 종일토록 놀고 짓지 못하면 가라.'고 했고, 그는 즉석에서 금준미주 천인혈 을 짓는다. 이어 전라도내 6명의 부패한 수령들을 봉고파직시킨다. (성이성의 4대손 성섭의 교와문집 . 조경남의 난중잡록)
석성현감이 생일날 과다한 잔치를 벌인 것은 춘향전에 등장하는 변사또의 모티브가 되었다.


계서당에서 추천받은 축서사에 올랐다. 해발900m정도까지 차로 오른다. 정상 부근 어마어마하게 웅장한 절이 나타난다. 압도하는 절이다. 하지만 너무나 압도하기에 고즈넉한 멋을 풍기는 부석사와 많이 대조가 된다. 

닭실마을에 갔다. 안동권씨 집성촌이라고 하며 아름다운 정자 청암정과 마을의 내력을 알려 주는 춘재박물관 모두 문을 닫았다. 코로나의 여파겠지. 닭실 마을은 찾는 이가 없고 을씨년스럽다. 봉화읍에 갔다. 강릉에서 태백을 거쳐 영주로 가는 철도가 있었다. 봉화시장은 거의 문을 닫았지만 시장 안의 식당에서 저녁을 배불리 먹었다. 근처의 풀마트는 한돈 뒷고기를 4근에 1만원이라는 믿을 수 없는 가격에 팔고 있다. 마트에서 막걸리 한 병 사서 해저 만회고택으로 이동했다. 아담한 방에 욕실이 붙어 있다. 쥔장은 방을 지글거리게 만들어 놓으셨고 국화차와 구운 밤을 주셨다.

소수서원에서 가져온 선비문화 책자를 숙소에서 보았다. 소수서원에 대한 소개와 함께 영주가 고향인 안향선생에서 - 퇴계 - 이익 -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한국 도학의 흐름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한국정신문화, 선비문화에 대해 조금은 눈이 트인 느낌? 아주 좋은 자료를 찾아서 기쁘다. 

먹을거리와 숙소

아점) 풍기읍 황토골 인삼불고기 - 인생 육개장집

점저) 봉화 시장의 사계절 식당 - 담백한 뼈해장국과 소머리국밥

숙소는 해저 만회 고택. 6만원, 샤워실 있는 아주 작은 사랑방이었고 이불을 깔아 놓으셔서 방이 지글지글 끓었다. 몸이 좀 안 좋았는데 뜨거운 바닥에 배를 깔고 있으니 점점 좋아진다. 4시 경 살짝 깼다가 다시 잤는데 꿈이 4시간동안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고 아주 현실 같은 꿈을 꿨다. 꿈 속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예전에도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어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스토리가 진행된다. 지금 같은 상황이 현실이라니 믿을 수 없어 라는 말을 꿈 속에서 한다. 너무나, 너무나 편안하게 잠을 잤던 하루.

자료 : 선비의 고장 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