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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흥진(04-05)

2005-10-19 [체험학습지도자과정] 명성황후생가

by Anakii 2005. 10. 19.
요즘 군포 전교조와 군포시 청소년수련관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체험학습 전문지도자 과정 연수를 받고 있습니다.
교사가 좋은 점이 이런 것입니다. 상당히 비중 있는 연수인데 간식비조로 월 1만원만 내고 연수비는 무료로 하고 있거든요.
강사진도 대단한 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우리 역사에 대한 많은 경험을 쌓게 될 것 같습니다.

저번 일요일에는 실제 답사로 여주를 다녀왔는데요, 명성황후 생가와 신륵사가 주제입니다.
강의는 성기룡 청소년수련관 운영팀장님이 맡으셔서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강의를 해 주셨지요.

여주의 원래 이름은 여흥인데 세종대왕릉을 이곳에 쓰면서 여주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여흥이란 이름 또한 이곳을 지나가는 남한강의 이름이 려강(儷江) 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주변의 광주는 관청에 납품할 용도의 도자기를 굽는 관요가 많았는데, 이곳 여주는 생활도자기의 고장이라 합니다.

또 이곳엔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구요, 명성황후 집안인 여흥 민씨의 고장이었답니다.
이곳 명성황후 생가는 여흥 민씨의 고택인데 숙종비 인현왕후의 아버지가 여흥민씨 민유중 대감이라 이곳에 그의 묘가 있습니다.
여흥 민씨는 이후 영,정조 때 소론으로 몰려 몰락하는 바람에 이곳 고택도 초라하답니다.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고 단지 외국인 선교사나 여행가들의 면담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며
사진도 없어서 여행기의 기록인 작고 아담하나 영민(영리하고 민첩함)한 모습이었다는 것만 전해지지요.

즉, 알려진 명성황후의 얼굴모습은 추측일 뿐이며 이 모습 또한 일본에 남아 있는 고문서 안의 조선궁인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니
명성황후의 진정한 모습은 아무도 모르는 셈입니다.


명성황후 생가 전경



별당-명성황후의 어릴 적 살던 곳이지요. 하지만 복원된 것입니다.

안채입니다. 이곳만이 유일하게 원래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탄생했음을 알리는 비


민유중 선생의 묘지



묘비에 씌여 있는 것을 읽어 보면 국구(國舅:임금의 장인) 려양부원군 익 문정 민 * 유중지묘(민유중의 묘. 가운데 있는 한자는 알수 없음. 사람이름을 부를 때 높이기 위해 삽입한 것 같음) 라고 되어 있으며 옆에 그의 두 부인이 합장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두 부인의 명칭을 보면 증(贈: 더하다) 해풍부 부인 이씨 부우(오른쪽에 같이 묻었다), 증 식성부 부인 송씨 부좌 (송씨 부인은 왼쪽에 묻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이분은 가운데 묻혔다는 이야기죠


망부석은 좌우 두가지인데 붙어 있는 동물은 세호(細虎: 얇은 호랑이)입니다. 하나는 망부석을 기어 올라가는 형국이며 나머지 하나는 망부석을 기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망부석과 같이 있는 문인석은 홀 [ 笏 ] 이라고 하는 것을 들고 있는데요, 용도는 잘 모르나 조선 시대에, 벼슬아치가 조현(朝見)할 때 조복(朝服)에 갖추어 손에 쥐던 패라고 합니다. 
일설에는 임금께 드릴 말을 먼저 써 놓고 컨닝하는 용도 아니었겠나 하는데요, 알 수 없죠. ^^


민유중 묘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시는 성기룡 팀장님


묘 아래쪽 명성황후 생가 옆에 있는 신도비입니다. 신도비는 묘의 주인이 한 일을 자세히 써 놓은 일종의 전기문인데요, 아래 거북이가 매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고개를 돌려 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