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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둔대2기(06-08)

2007-03-17 파리 집단 학살 사건

by Anakii 2007. 3. 17.
일전에 우리 집 거실에서 아주 성가시게 비행하고 있던 파리 한 마리가 있었답니다. 뱅뱅 돌아다니는 게 하도 성가셔서 손으로 잘 조준해 허공가르기로 그녀석을 기절시키고 나서 별 생각 없이 베란다에 놓아 주었죠. 예전에도 그런 녀석을 기절시킨 뒤에 창문 밖으로 내던지기를 자주 했던 터인 데다 이제는 날아다니는 녀석도 비행 궤적을 예측해서 손으로 기절시킬 정도니 이번에도 별 생각 없이 기절시켜서 내보낸 거죠.

그런데, 그날따라 왜 하필이면 베란다였을까요? 

어제 베란다에서 기르고 있는 화초들을 돌보러 나간 경아씨가 기겁을 합니다. 파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 여섯 마리라구요. 뭐, 베란다 바깥 창문을 열어 놓지도 못하는 초봄이라 밖에서 들어올 리는 없고 제가 내보냈던 녀석이 새끼를 친 거겠죠? 그도 그럴 것이, 밖은 춥지요, 베란다는 따뜻한 데다 웬갖 화초와 빨래들 때문에 숨거나 알을 칠 공간이 충분했으니까 그럴 만도 하긴 하죠. 

좀 있다 제가 해결사를 자처하고 나가 보니 그나마 넓지 않은 베란다에 파리가 대략 7-8마리 보입니다. 아뿔싸, 생각 없이 쫓아낸 베란다가 그들의 천국같은 곳이었을 줄이야. 이 속도면 얼마안가 왕창 불어날 것인데 그쯤 되니 이젠 저와 파리의 생존 경쟁이 되었습니다. 

한 마리 살생 안하려 했던 얄팍한 생각으로 결과적으로 줄초상 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죠. 씨네21 휘둘러 대면서 깔끔하게 보내버리느라 좁은 베란다에서 쇼를 했답니다.

얼마 전에는 개봉해 두었던 생협 메밀국수가 가늘게 파먹은 것처럼 쏠아져 있던 생각이 납니다. 뭔가 하고 털어내고 나서 물에 삶아 보니 글쎄, 구더기 두 마리와 막 날개가 돋은 파리 한 마리가 동동 떠올랐지 뭡니까. 웬걸, 육수를 만들었더라구요. 그 때는 적당히 건져 내고 삶은 국수를 물에 씻은 뒤 맛있게 먹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 메밀국수가 그 녀석들의 월동 장소가 아니었겠나 생각이 드네요. 그늘지죠, 먹을 것 많지요, 따뜻하죠, 그놈들도 무농약 국수 좋은 건 알아가지고 말예요. 유기농,무농약이지만 건면이라 곰팡이 슬 걱정은 없었지만 그런 복병이 있더라구요.

또 한가지, 주방에서 놀고 있던 작은 나방(이거, 뭐라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뒀다가 보니, 쌀독에 넣어 두었던 혼합 잡곡 구석구석에다 고치를 만들어 놓아서 쌀 다 퍼내고 비벼 내느라 생쑈를 했던 기억도 나네요. 

생각하기 따라서는, 아니, 대부분 그러시겠지만, 저희가 좀 구질구질 하게 산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그런데, 생각을 좀 달리 해 보면 그 녀석들의 그런 행동이 우리 먹거리를 판단하는 데 바로미터가 된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녀석들은 그 작은 몸집 크기만큼이나 몸에 좋은 것, 안좋은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더란 말이죠. 저희집 쌀독은 엉성하게 뚜껑을 덮어 놓아서인지 거의 무방비 상태인데도, 어쩌다 쌀이 떨어져서 슈퍼에서 사다놓은 쌀에는 그 정도로 나방 고치가 창궐하지는 않았었거든요. 

예전에는 군것질을 즐겼기 때문에 쥐포라든가 명태포 등 각종 포를 사 놓기도 했는데, 분명 어떤 쥐포나 명태포에는 여지없이 개미가 드글거리는 한편, 어떤 것에는 개미가 얼씬도 안하는 것도 보았으니까요.

그 작은 녀석들에게 많이 배우고 삽니다. 

본능적으로 제 몸에 좋은 것, 나쁜 것 확실히 구분해서 먹거리를 선택할 줄 아는 그녀석들에 비해서 머리 좋다는 사람들은 원초적 본능을 잊어버리고 내 몸에 얼마 정도 독이 되더라도 별 생각없이 먹고 마시고 하잖아요? 결국, 저흰 먹거리 안전에 대한 판단 기준을 그녀석들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네요.

다시 파리 몰살시킨 이야기로 돌아오죠. 

쬐끄만 녀석들에게 그런 가르침을 받아서인지, 돌아다니는 파리나 나방 한 마리도 허투루이 죽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짧은 생각 때문에, 결과적으론 어제와 같이 그 녀석들과 생존 경쟁에 돌입해 대량학살(?) 참극을 벌였으니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은 격이 아닐 수 없네요.

이번 일의 교훈은? 파리 생포하면 잊지 말고 창문 밖으로 내던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