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사비(부여) 백제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은 사비성의 나성(羅城. 도읍지 외곽을 싸고 도는 성) 동편에 해당되며 무덤들은 낮은 산의 남쪽 경사면에 줄을 지어서 배치되어 있다. 일제시절인 1915년과 1917년에 6기의 무덤이 확인되었고 4기의 무덤이 발굴 조사되었다. 해방 후 1965년에 다시 2기가 더 발견되어 현재까지 총 8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동쪽 아래에 있는 무덤은 유일한 벽화무덤이며 널방 네 벽에는 돌 표면에 직접 그린 사신도가 남아 있었고, 천장에는 연꽃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대부분의 무덤이 심하게 도굴되어 출토 유물은 얼마 없지만, 약간의 금동제식금구(金銅製飾金具)가 출토되어 백제 공예기술을 엿볼 수 있다. 조선의 무덤은 맨 위에 가장 높은 어른이 묻히는 방식이지만 백제의 무덤은 그런 규칙은 없고, 단지 동시대의 사람들을 같은 줄에 묻는다고 한다. 이곳에는 사비시대 6왕 중 최소 3사람의 왕이 묻혀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 능산리 고분을 지키는 능원이 있었을 자리(사진)에서 백제의 금동대향로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사신도 사신은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신수(神獸)이며 우리 조상들은 방향과 색과 음양오행 사상을 연결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동쪽을 상징하는 것은 청룡이고 색은 청색, 봄과 대응하며 피어나는 기운인 목(木)에 해당되며, 남쪽을 상징하는 것은 주작으로서 색은 붉은색, 계절은 여름, 성한 기운인 화(火)와 대응한다. 서쪽을 상징하는 것은 백호로서 색은 흰색, 계절은 사그라지는 가을, 흡수하는 기운인 금(金)에 대응하며 북쪽을 나타내는 것은 현무, 색은 검은색, 계절로서는 얼어붙은 겨울, 음양오행으로는 수(水)이며 가운데를 나타내는 것은 황룡, 색은 노란색, 음양오행으로는 토(土)에 해당한다. 벽화무덤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듯 이에 해당하는 사신이 옆면에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연꽃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불교의 극락세계인 연화세계를 표시한 것 같다. 직접 실제 무덤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전시관 옆쪽으로 실제와 유사한 모조를 만들어 놓아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모조 무덤 강사님은 신라 무덤에 비해 백제 무덤이 크기가 작은 것을 두고, 원래 약소국이나 후진국이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해 거대하게 조형물을 만들지 않느냐고 하시면서 백제는 아마도 그럴 필요가 없이 이미 강대국이었으므로 무덤을 그다지 크게 만든 것 같지 않다고 하신다. 지역에 대한 애착심이 깊으신 분이어서 그런 것인가? 하지만 이 말은 사실에 가깝다. 백제는 해상왕국으로서 당시 당나라 동안에 세력을 뻗치고 있었으며 당-백제-일본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무대로 하였으니 말이다. 말기에도 신라보다는 강대국이어서 자주 신라를 괴롭혔으며 거의 신라의 보호국 행세를 해 왔으니 말이다. 후에 세워진 후백제 또한 말기 신라의 보호국처럼 행세하기도 했으니 전라/충청도 사람들이 강하기는 강했나 보다. 능 옆에는 당나라에 붙잡혀서 일생을 마친 의자왕과 태자 융의 무덤이 외로이 조성되어 있다. 무덤을 부를 때의 이름도 알아 놓아야 하겠는데, 임금의 무덤은 능, 왕자의 무덤은 원, 일반인의 무덤은 묘라 부른다. 또한 주인은 알 수 없으나 무덤에 벽화나 특이한 기둥 같은 것이 있는 무덤을 총 이라 부른다. 무덤에서 내려오며 생각한 것 하나. 이곳의 잔디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해 놓았다. 경주의 경우엔 잔디는 들어갈 수 없도록 해 놓았었는데, 이곳은 누구든지 밟고 갈 수 있게 하여 마치 공원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던 절 터 의자왕과 태자 융의 무덤
|
'LOG > 흥진(04-05)'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5-11-26 늦가을, 부산 (0) | 2005.11.26 |
---|---|
2005-11-13 [체험학습지도자과정]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0) | 2005.11.13 |
2005-11-13 [체험학습지도자과정] 금동대향로 (0) | 2005.11.13 |
2005-11-13 [체험학습지도자과정] 부여박물관 (0) | 2005.11.13 |
2005-11-13 [체험학습지도자과정] 부소산성, 낙화암, 삼충사(三忠祠) (0) | 2005.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