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충사
삼충사에 들어 가자 강사님이 모두를 불러 세우신다. 바로 현재 위치에서 가옥 자체를 감상하라는 이야기.
삼충사는 지붕 양쪽이 위로 들린 기솟음법을 따르고 있으며 지붕 아래에서 보면 가운데(처마)에서 양쪽(추녀)으로 갈 수록 약간씩 바깥쪽으로
타원을 그리며 나아가는 모양이 되어 있다. 이렇게 지붕에서 시작되는 부드러운 두 선의 미학을 알고 감상해야 한다.
이렇게 알고 보니 삼충사는 꽤 위풍당당한 한옥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삼충사 지붕을 아래에서 보면 처마가 두 개인것이 보이는데, 바깥쪽을 뜬처마라 하고 안쪽을 서까래라 하는데, 이렇게 처마가 둘인
것을 겹처마라 부르고 , 처마가 하나인 것을 홑처마라 한다.
기둥의 위에 처마를 받치는 구조물을 "포" 라 하는데 이것이 기둥마다 하나씩 있는 것을 주심포양식이라 부르고 기둥 사이에도
있는 것을 다포양식이라 부른다. 다포양식은 꽤 권위 있는 건물에서 보이는데,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과 조사당이
다포 양식으로 되어 있다.
♣ 다포 양식 설명
♣ 주심포 양식 설명
처마의 양쪽 끝을 추녀라고 하는데 삼충사의 추녀는 한껏 밖으로 치켜올려져 당당함을 나타내고 있다.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성왕의 웅지가 담겼던 부여의 수비성이었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도 일반인과 귀족은 성 밖에서 살았으며
성안은 군인들만 있었다고 한다. 만약 유사시엔 모든 곡식과 사람들을 성 안에 모은 뒤, 주거지를 불태우는 청야작전을 펴며
성에서 적을 맞았다고 하는데, 청야작전으로 인해 보급길이 막힌 적군이 배고픔에 후퇴하게 될 때 내려가서 적을 무찔렀다고 전한다.
이로 인해 삼국시대의 전쟁 대부분은 평야에서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공성전이 주였다는 강사님의 말씀.
부소산성에는 농성하기에 알맞은 수비형 성곽답게 곡식을 보관했던 군창지가 남아 있다.
낙화암 쪽으로 잠깐 가다 영일루에 들렀다. 영일루는 본래 부소산성 내의 맨 동쪽에 세워져 있었다.
백제의 왕들이 매일 이곳에 올라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하루의 국정을 계획했다는 곳이다.
이곳에 올라서면 부여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방사형으로 뻗은 길이 아름다운 도시.
공교롭게도 현대 부여는 일제시대에 계획된 계획도시로서 건립 당시 100년은 고칠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일루의 처마 역시 겹처마로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단청에 저절로 손이 갔다.
이런 건물의 기둥을 보수하는 방법을 누군가 물었는데 강사님이 손으로 가리키며 이곳을 펌프로 들어 올리고 기둥을
보수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둥 아래쪽에 이음새가 보였다.
♣ 기둥 보수 방법을 일러주시는 강사님
♣ 영일루에서 본 부여 전경
♣ 영일루의 겹처마
낙화암은 일찌기 의자왕의 퇴폐적인 행각에 의한 삼천 궁녀가 몸을 던진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상식이라고 하신다
남자들은 계백의 5천 결사대에 나가 장렬히 전사했으며 남은 아녀자들이 이곳에서 적에 손에 몸을 맡기기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곳이다.
삼천 궁녀라는 말은 역사서 어디에도 없으며 후에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한다. 사실, 백제 땅 어디에서 삼천명이나 되는
궁녀를 조달한단 말인가. 망한 나라의 왕은 이래저래 나쁜 놈으로 역사에 기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승자의 도덕성을 지킬 수 있게 되니까.
길을 따라 내려와 고란사에 들렀다. 고란사의 고란초는 이곳에서만 서식한다고 하는데, 알고 보면 고사리 종류처럼 포자로
번식하는 녀석이다. 이곳의 자생 고란초는 겨울에도 죽지 않는다고 하는데, 다른 곳에 심으면 겨울에 죽는다고.
또한 이곳의 고란약수는 백제의 왕들이 즐겨 먹었던 물로서 한 번 먹을 때마다 3년은 젊어진다는 속설이 있고, 너무 많이 먹어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노인의 전설도 전해 온다.
고란사를 나온 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버스가 주차해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저녁 풍경이 아름답다.
부소산성 앞에서 강사님이 내리셨다. 전형적인 충청도 분 억양이었으며 차근차근히 아주 설명을 친절하게 해 주신 분이다.
오는 길은 상당히 막혔는데, 특히 논산-천안간 고속도로를 빠져나올때 쯤은 트래픽 잼을 넘어서 말 그대로 차 죽이다.
어디서 이리도 많은 차들이 주말에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인터넷 뉴스사이트 분위기 보면 허구헌날 불황,불황 하는데, 방 안에만 콕 박혀 있는 산업예비군들만 인터넷을 하는지...
삼충사에 들어 가자 강사님이 모두를 불러 세우신다. 바로 현재 위치에서 가옥 자체를 감상하라는 이야기.
삼충사는 지붕 양쪽이 위로 들린 기솟음법을 따르고 있으며 지붕 아래에서 보면 가운데(처마)에서 양쪽(추녀)으로 갈 수록 약간씩 바깥쪽으로
타원을 그리며 나아가는 모양이 되어 있다. 이렇게 지붕에서 시작되는 부드러운 두 선의 미학을 알고 감상해야 한다.
이렇게 알고 보니 삼충사는 꽤 위풍당당한 한옥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삼충사 지붕을 아래에서 보면 처마가 두 개인것이 보이는데, 바깥쪽을 뜬처마라 하고 안쪽을 서까래라 하는데, 이렇게 처마가 둘인
것을 겹처마라 부르고 , 처마가 하나인 것을 홑처마라 한다.
기둥의 위에 처마를 받치는 구조물을 "포" 라 하는데 이것이 기둥마다 하나씩 있는 것을 주심포양식이라 부르고 기둥 사이에도
있는 것을 다포양식이라 부른다. 다포양식은 꽤 권위 있는 건물에서 보이는데,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과 조사당이
다포 양식으로 되어 있다.
♣ 다포 양식 설명
♣ 주심포 양식 설명
처마의 양쪽 끝을 추녀라고 하는데 삼충사의 추녀는 한껏 밖으로 치켜올려져 당당함을 나타내고 있다.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성왕의 웅지가 담겼던 부여의 수비성이었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도 일반인과 귀족은 성 밖에서 살았으며
성안은 군인들만 있었다고 한다. 만약 유사시엔 모든 곡식과 사람들을 성 안에 모은 뒤, 주거지를 불태우는 청야작전을 펴며
성에서 적을 맞았다고 하는데, 청야작전으로 인해 보급길이 막힌 적군이 배고픔에 후퇴하게 될 때 내려가서 적을 무찔렀다고 전한다.
이로 인해 삼국시대의 전쟁 대부분은 평야에서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공성전이 주였다는 강사님의 말씀.
부소산성에는 농성하기에 알맞은 수비형 성곽답게 곡식을 보관했던 군창지가 남아 있다.
낙화암 쪽으로 잠깐 가다 영일루에 들렀다. 영일루는 본래 부소산성 내의 맨 동쪽에 세워져 있었다.
백제의 왕들이 매일 이곳에 올라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하루의 국정을 계획했다는 곳이다.
이곳에 올라서면 부여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방사형으로 뻗은 길이 아름다운 도시.
공교롭게도 현대 부여는 일제시대에 계획된 계획도시로서 건립 당시 100년은 고칠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일루의 처마 역시 겹처마로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단청에 저절로 손이 갔다.
이런 건물의 기둥을 보수하는 방법을 누군가 물었는데 강사님이 손으로 가리키며 이곳을 펌프로 들어 올리고 기둥을
보수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둥 아래쪽에 이음새가 보였다.
♣ 기둥 보수 방법을 일러주시는 강사님
♣ 영일루에서 본 부여 전경
♣ 영일루의 겹처마
낙화암은 일찌기 의자왕의 퇴폐적인 행각에 의한 삼천 궁녀가 몸을 던진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상식이라고 하신다
남자들은 계백의 5천 결사대에 나가 장렬히 전사했으며 남은 아녀자들이 이곳에서 적에 손에 몸을 맡기기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곳이다.
삼천 궁녀라는 말은 역사서 어디에도 없으며 후에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한다. 사실, 백제 땅 어디에서 삼천명이나 되는
궁녀를 조달한단 말인가. 망한 나라의 왕은 이래저래 나쁜 놈으로 역사에 기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승자의 도덕성을 지킬 수 있게 되니까.
길을 따라 내려와 고란사에 들렀다. 고란사의 고란초는 이곳에서만 서식한다고 하는데, 알고 보면 고사리 종류처럼 포자로
번식하는 녀석이다. 이곳의 자생 고란초는 겨울에도 죽지 않는다고 하는데, 다른 곳에 심으면 겨울에 죽는다고.
또한 이곳의 고란약수는 백제의 왕들이 즐겨 먹었던 물로서 한 번 먹을 때마다 3년은 젊어진다는 속설이 있고, 너무 많이 먹어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노인의 전설도 전해 온다.
고란사를 나온 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버스가 주차해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저녁 풍경이 아름답다.
부소산성 앞에서 강사님이 내리셨다. 전형적인 충청도 분 억양이었으며 차근차근히 아주 설명을 친절하게 해 주신 분이다.
오는 길은 상당히 막혔는데, 특히 논산-천안간 고속도로를 빠져나올때 쯤은 트래픽 잼을 넘어서 말 그대로 차 죽이다.
어디서 이리도 많은 차들이 주말에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인터넷 뉴스사이트 분위기 보면 허구헌날 불황,불황 하는데, 방 안에만 콕 박혀 있는 산업예비군들만 인터넷을 하는지...
아름다운 단풍과 함께 하는 산성길 |
♣ 겹처마 감상
♣ 주심포 감상 |
삼충사
백제 마지막의 세 충신인 계백, 성충, 흥수를 기리는 사당이다. 1957년에 처음 세워졌지만 한옥의 양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곳이다.
삼충사 앞켠에는 건립사적비가 있었다.
삼충사 건립 사적비. 안팎의 색이 모두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져 있다
오석에 새긴 글은 천년 이상을 가기 때문에 비석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며 정으로 쪼아 글씨를 쓰면 검은 색의 돌이
그 부분만 회색으로 변해 글자가 보인다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만드는 것은 공이 너무 많이 들어 가기 때문에 현재의 사적비는
컴퓨터로 쓴 다음 에어제트로 새겼다 하는데, 이렇게 할 경우엔 쓴 자리가 회색으로 바뀌지 않아 다시 코팅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만든 비는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니 현대 최첨단 기술도 별 게 아니다.
백제 마지막의 세 충신인 계백, 성충, 흥수를 기리는 사당이다. 1957년에 처음 세워졌지만 한옥의 양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곳이다.
삼충사 앞켠에는 건립사적비가 있었다.
삼충사 건립 사적비. 안팎의 색이 모두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져 있다
오석에 새긴 글은 천년 이상을 가기 때문에 비석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며 정으로 쪼아 글씨를 쓰면 검은 색의 돌이
그 부분만 회색으로 변해 글자가 보인다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만드는 것은 공이 너무 많이 들어 가기 때문에 현재의 사적비는
컴퓨터로 쓴 다음 에어제트로 새겼다 하는데, 이렇게 할 경우엔 쓴 자리가 회색으로 바뀌지 않아 다시 코팅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만든 비는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니 현대 최첨단 기술도 별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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