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4-07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웹용으로 정리하고 나서.

LOG/흥진(04-05) 2005. 4. 7. 16:00    Print Friendly Version of this pagePrint Get a PDF version of this webpagePDF
우연히 인터넷에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각 시대에 해당되는 지나 역사서 비교본이 있길래 웹용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모두 일주일이 걸렸군요.

학생 때, 삼국사기가 중국 역사관에 위주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지만, 실제로 정리해 보니 심각한 수준이었더군요.
무릇, 역사란 자국의 입장에서 기술되어야 하는 것인데 삼국사기를 저술했던 이 김부식이란 자의 본국은 아마도 지나(중국)이었던가 봅니다.

김부식 이자는 고구려 역사를 대단히 객관적(?) 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잘 읽다 보면 이것이 중국 사서인지 우리 사서인지 구분이 안가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이 발견됩니다.
광개토대왕 이전의 역사에서는 자주 상대방 입장에서만 기술한 내용이 많이 나오며, 장수왕 이후부터는 아예 지나(중국) 역사책 이상으로 지나의 시각에서 기술하였더군요.

저도 이 자료를 정리하면서 삼국사기의 내용이건만  중국 사서의 내용인줄 착각하고 편집상 실수를 많이 했답니다. 도대체 이 김부식이란 자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예를 들어드리죠. 삼국사기는 태조대왕때 요동을 정벌한 내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태조대왕 53년(105)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요동에 들어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태수 경기가 군사를 내어 막으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에 요동태수 경기가 맥인을 격파하였다. <-- 누구의 시각입니까? 맥인이 고구려쪽이니 당연 "우리가 졌다" 라고 해야 옳겠지요?
[후한서 동이전] 이에 자라 용맹한 장사가 되니 여러번 변경을 침범하였다. 화제 원흥 원년 봄 요동에 다시 들어와 육현을 빼앗아 노략질 하니 태수 경기가 나아가 이를 격파하여 그 큰 장수를 베었다. 

이 후 수나라와 대적했던 영양왕 이후의 문서는 아예 가관입니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수나라 황제가 했던 말은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며 마치 지나 사서 같은 분위기로 나갑니다. 
오히려 중국 사서에는 수나라 황제의 고구려 침략원인이 간략하게 언급되는 반면  우리 삼국사기에서에서는 왜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해야 하는지 조목조목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나라의 침략 때도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당나라 황제는 한없이 인자하기 그지없는 반면, 고구려는 당나라 황제의 인자함을 이용하여 전쟁을 가까스로 이겨나가는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아래에 조금의 예를 들어 드릴께요.

영양왕 23년(612) 수의 고구려 침략시의 삼국사기의 기술 내용입니다.

여름 5월. 이전에 여러 장수가 동쪽으로 내려올 때 황제가 경계하여 말하였다.“모든 군사 일의 나아가고 멈춤을 반드시 나에게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아라.”요동에서 [우리 군사는] 자주 나가 싸우다가 불리하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군대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고, 또 여러 장수에게“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마땅히 어루만져서 받아들일 것이며 군사를 풀지 말라.”고 명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안의 사람들은 문득 항복을 청한다고 하였다. 여러 장수가 황제의 명을 받았으므로 감히 때에 맞추어 바로 가지 못하고, 먼저 [사람을] 시켜 급히 아뢰었는데, 회답이 올 때는 성안의 방어도 역시 갖추어져 적절히 나가 항거하여 싸웠다.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 거듭하였으나 황제가 끝내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 후 성은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같은 부분 지나(중국)사서의 내용입니다.

양제가 여러 군사들에게 공격하라 명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칙서를 내리니, 고려가 만약 항복한다면, 곧 마땅히 위로하며 얻어야 하고, 병사들이 들어가 불을 놓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도적들이 문득 항복하려는 말을 하고, 교지를 받들고자 하나 감히 나아가질 못한다고 하였다. 
먼저 나아가 아뢰고 이를 보고하자, 적이 또 갖추오 방비하고 다시 나와 방어전을 하였다. 이와 같음을 세 번을 하였는데, 양제가 깨닫지를 못하였다. 이로말미암아 식량이 다 되고, 병사들이 지치자, 보급도 잇지 못하니 여러 군사들이 많이 패하여, 반이 되었다.


오히려 중국 사서가 스스로에 대해 객관적이지요? 하지만 삼국사기는 전적으로 지나(중국)의 시각으로 씌여졌다는 것을 이번 정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답니다.  말글과 역사를 잃어버리면 민족을 잃는 것인데, 이놈은 스스로 제나라 역사를 지나(China)의 시각으로 썼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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