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인들의 문화적 습관과 생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제 답사와 더불어 그들이 살아 온 역사를 관찰하는 것이 가장 빠를 거다. 이 부분엔 여행 후 느끼게 된 내용을 미리 조사했던 내용에 덧붙여 작성했다.
가. 역사 이전
오랜 옛날부터 중국과 베트남, 인도와 말레이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필리핀 군도로 들어왔으며 원주민인 네그리또족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 화산군도 지형의 특성상 섬과 섬, 지역과 지역 간의 왕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국가의 개념은 전무한 상태였다.
서로 공통점이 없는 공동체들은 사냥, 채집, 어로, 벼농사를 하며 옮겨 다니며 생활했으며 다투(추장)의 지도 아래 바랑가이(부락)를 형성하였다. 16세기까지 이 바랑가이가 가장 높은 정치 단위였는데, 이른 보면 같은 시기 이미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고 국가 개념을 확립했던 주변 국가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역사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16세기라면, 유럽은 지리적 발견으로 떠들썩 한 시기, 조선은 중엽으로 접어드는 최근이라 불릴 수도 있는 시기죠!)
필리핀 여행 중 루손 섬의 마닐라, 파나이 섬의 깔리보, 쎄부 섬의 쎄부, 보홀 섬의 딱빌라란, 팔라완 섬의 푸에르토 프린세사 각각의 도시들 마다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 이런 이유였을까?
나. 이슬람의 전파와 스페인 점령기
16세기 초, 말레이반도에 광범위하게 퍼졌던 이슬람이 필리핀에 들어와 북쪽으로는 마닐라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나 1521년, 마젤란이 필리핀에 도착해 이 많은 섬들이 에스빠냐령이라고 선포하면서 선의인지 악의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국가로서의 기록된 역사‘가 시작된다.
마젤란은 섬 주민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하며 동시에 지배력을 넓혔지만 쎄부 섬의 근방인 막탄섬의 지배자였던 라푸라푸에게 패해 전사했다. 이 후 에스빠냐는 지속적으로 함대를 보내 필리핀을 식민지화 하는 데 힘썼고 각 섬의 추장들에게서 섬의 지배권을 빼앗았다. 하지만 섬 간의 연계가 거의 없는 지역적인 특성 상 모든 섬들의 지배자로부터 지배권을 빼앗아야 했는데, 1571년 무슬림 추장인 라자 술라이만에게서 마닐라를 빼앗고 이곳을 필리핀의 수도로 선포하기에 이른다.
한 가지 예외적인 일이 있는데, 1565년 에스빠냐 정복자 레가즈피와 보홀섬의 지배자인 무슬림 라자 시까뚜나와 맺은 상호 평화협정이다. 이 평화협정을 상징하는 깃발이 보홀 섬의 문장이며 보홀 섬사람들의 자존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보홀섬은 이후 19세기에 잠깐 독립한 적도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섬을 ‘Republic of Bohol'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민다나오 섬 및 좀 더 남서쪽에 있는 술루 제도에 살고 있는 이슬람교도들인 모로족은 에스빠냐 사람들에게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다. 마닐라의 중앙정부는 19세기까지도 중세적이며 압제적인 정치를 했으며 마닐라 시 역시 압제적인 종교 중심지로서 여러 섬들을 지배하는 한편, 상업 중심지로서 중국의 비단과 멕시코의 은의 중계항 역할을 했다. 1830년대부터 마닐라는 외국에 문호를 개방했고, 유럽에서 설탕과 마닐라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상업적인 농업이 크게 성장했다.
다. 필리핀 혁명기
에스빠냐의 힘이 약해지면서 가톨릭 수사들은 점점 민중을 억압하기 시작했고 원주민들의 저항도 시작되었다. 19세기에는 유럽에서 교육받던 부유한 혼혈인들 사이에서 필리핀 민족주의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이들의 중심에는 호세 리잘 박사가 있었다. 이분은 우리나라의 김구 선생, 중국의 손문 선생 정도에 해당하는 분으로서 1896년 에스빠냐에 의해 처형당함으로서 자유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필리핀의 어느 도시에나 중요한 거리의 이름은 리잘 거리다.
이 후 카티푸난이라는 급진적인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고 1896년에 대대적인 무장혁명이 일어났으며 18개월 동안의 투쟁을 거쳐 에스빠냐와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평화를 위한 협정 내용은 지켜지지 않은 채로 에스빠냐와 미국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미국은 에스빠냐를 몰아내고 필리핀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 혁명 지도자 아기날도를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라. 미국 지배 시기
미국의 공화당은 필리핀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려고 마음먹고 필리핀이 자치를 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선포했으며 필리핀 독립운동은 1906년까지 활발하게 일어났다. 미국은 1945년 이후 우리나라에 했던 것과 같이 필리핀의 자치와 독립을 위해 국민을 훈련시킨다는 명목으로 지배력을 넓혔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일본이 했던 것과 같이 미국은 도로를 건설하고 수많은 교사를 들여 와 영어를 보급했으며 하수시설을 만들고 미 개종 상태의 부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며 미국화시켰다. 그리고 1935년 미국에 의한 독립을 이룬 필리핀 연방이 만들어졌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아 일본에 점령되었다.
마. 필리핀 독립기에서 현재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후, 1946년 미국 정부를 본뜬 정부를 세우고 필리핀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마누엘 로하스가 선출되었으며 1965년 마르코스가 집권한 이후 독재정치를 실시하다 1983년 강력한 야당 지도자인 아키노가 피살되었고 1986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가 부정선거로 재당선되자 대대적인 민중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이를 피플파워라고 부르며 민중들은 마르코스를 축출해내고 1986년 2월 25일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일은 당시 전두환의 독재정치 하에 있었던 우리나라 민중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어 내는 데 일정 수준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아키노 정부 역시 정국안정과 개혁에 성공하지 못하였고 쫓겨난 마르코스의 부인인 이멜다가 귀국하여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기도 했으나 피델 라모스 국방장관이 아키노의 지지에 힘입어 1992년 5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부정부패는 끊이지 않았고 경제도 나아지지 못했다. 2001년 필리핀인들의 민중저항의 결과, 아로요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고질적인 부정부패가 이어지는 와중에서도 외형적으로는 2005-2007년 동안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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